1. 이렇게 리뷰를 쓰면서 다시 생각해봐도 좀 웃긴 얘기긴 한데, 저는 한국인이고 또한 컨텐츠에 관련한 전공을 하고 그런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정작 국산 컨텐츠에 대해 묘하게 차별하곤 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외국 소설과 한국 소설을 한 권씩 사서 읽어야 한다면 외국 소설부터 먼저 읽고, 외국 영화와 한국 영화를 봐야 한다면 외국 영화부터 먼저 봅니다. '문화 사대주의자?'라고도 생각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저는 컨텐츠의 중요한 속성에는 '판타지'라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산 컨텐츠에 판타지 속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자주 보고 듣는 소재로 얘기를 만들고 그것을 즐기다보면 기묘한 형태로 감정 이입이 되면서 혼자서 망상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에 비해 외국 컨텐츠들은 아무래도 생소한 상황과 소재들에서 기인한 판타지 속성이 강하게 느껴져서 같은 얘기라도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더군요.
그렇다보니 국산 영화를 잘 안 보게 됩니다. 이런 묘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영화 '과속스캔들'은 재미있게 봤는데, 어느 순간 다시 돌려보면서 복기하게 되더군요. 이럴 때는 QOOK이 참 편하죠;)
2. 영화 속 캐릭터들의 설정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외할아버지 남현수(차태현 분) 36세
딸 황정남(박보영 분) 22세
외손자 황기동(왕석현 분) 6세
남현수는 중학생 시절 옆집에 놀러갔더니 만나려는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가 샤워를 다 하고는 젖은 머리를 흔들면서 나와서(...) 그랬는지 대학생 누나와 대형 사고를 칩니다. 나이를 역산해보면 옆집 누나가 재수를 하지 않은 대학교 1학년이라고 가정하면 19세, 남현수 학생이 2차 성징이 갓 시작된 질풍노도의 중학교 1학년인 경우 14세입니다. 그렇게 아빠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태어난 황정남양은 중학교 3학년인 16세에 동네 오빠와 사고를 치고는, 황기동군을 낳습니다.
물론 여기서 임신 기간은 계산에서 제했습니다만,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쓴 강형철 감독님은 정말 빠듯하게 가족 관계를 설정했습니다.
이렇게 무리한 설정(^^)은, 남현수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큰 문제로 다가옵니다. 공식적으로는 미혼인데 딸 아니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히 강한 한국 사회에서의) 아들일지라도 갑자기 등장한다면 쉽게 인정할 수 없을 텐데,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사위(?)와 사이좋게 사고친 외손자까지 이끌고 나타난 딸은 남현수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입니다.
예전이었다면 가볍게 부지깽이를 휘두르거나 혹은 머리끄댕이를 잡고는 셰이커로 칵테일 만들 듯이 두 어번 흔들며 관계를 부정한 다음, 쌀 몇 섬 값의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손에 쥐어주고는 뒷문으로 내보내겠지만 의학의 발전은 그러한 거짓말쟁이들의 입지를 점점 좁게 만듭니다. 체내의 디옥시리보핵산은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대조를 통해 일정 수치 이상의 결과가 나오면 유전자를 제공한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은 병원에 가는데, 남현수의 직업 특성상 하필이면 동물병원(!)에 가게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수의학 역시 의학의 한 분야인지라, 개든 사람이든 공정한 검사 결과를 뽑아냅니다. 여기에 불복하면 그 사람은 개만도 못한 사람이 됩니다;)
3. 여러 설화(=판타지)에서 주인공은 고아로 자라지만 그/그녀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가족을 찾아 모험을 떠납니다.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오래 전에 잃어버린 가족들 앞에 서게 된 주인공은 최종 시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오랜 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여전히 유전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이 과정까지 무사히 통과하면 그/그녀는 가족의 일원이 되며, 일원이 된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만큼 가족이라는 소재는 사회적 안전보장이 약한 한국 사회에서 매우 큰 존재감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영화 '과속스캔들'은 정말 잘 만든 가족 영화입니다.
가족을 소재로 했고
가족을 대상 관객으로 잡고
마지막에 가족이 되는 것을
가족이 행복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가족 영화입니다.
이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조금은 애매한 생각이 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현수는 의학의 힘을 통해 황정남과 황기동을 받아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음악성'을 알게 되면서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 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감독의 입장에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두 모자가 음악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면 남현수는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물론 영화에서는 가족으로 하나 될 수 있도록 잘 준비된 여러 가지 소재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음악이 가장 큰 소재라는 것에 반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남현수의 행보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려는 찰나에, 영화는 조금은 신파조로 흘러가며 기분좋게 끝납니다.
4. 누가 뭐라 그래도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또한 소재가 전 세계적으로 잘 먹힐 수 있는 이야기인 만큼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다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미국적 사고 방식에서 친부를 찾아가야하는 이유는 어떻게 설정될까요? 이런 상상을 하면서 영화를 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5. 그건 그렇고, 영화 과속스캔들을 얘기하면서 배우들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개성과 매력이 각자 장난이 아닙니다. 차태현씨, 박보영씨(!) 그리고 왕석현군 이 세 사람의 연기에만 집중해서 영화를 3번 반복해서 보는 것도 이 영화를 즐기는 다른 방법이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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